Tuesday, 24 March 2009

ฮงกุกยอง (홍국영, Hong Guk-Yeong)


ฮงกุกยอง (홍국영, Hong Guk-Yeong)

ฮงกุกยอง (홍국영, Hong Guk-Yeong)(พ.ศ. 2291-2324) เดิมเป็นอาลักษณ์ ต่อมาจอง-ฮูกยอม ราชเลขาในสมัยพระเจ้ายองโจ ได้ให้ไปอยู่สภาการปกครอง ต่อมาเมื่อองค์ชายลีซาน ได้ครองราชย์เป็นพระเจ้าจองโจ ก็แต่งตั้งเขาเป็้นราชเลขาและนำน้องสาวของเขาเป็นพระสนม แต่เป็นได้ 2 ปีก็สิ้นพระชนม์

ฮงกุกยอง คิดว่ามเหสีฮโยอึยวางแผนฆ่าน้องสาวตนเอง จึงวางแผนปลงพระชนม์ืแต่ถูกจับได้และเนรเทศไปที่อื่นและเสียชีวิตในเวลาต่อมาขณะอายุเพียง33ปี


홍국영

홍국영(洪國榮, 1748년~1781년)은 조선 후기의 권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 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나이에 정조의 충복으로 헌신했으나,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 축출당한 풍운아적인 삶을 살았다.

생애

초기 생애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홍국영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고,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국영의 친부 홍낙춘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가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는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정순왕후 김씨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다.

1772년 9월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1위(총 15인 중 15위:출처 조선문과방목영조48년정시)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듬해인 1773년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영조가 그를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그가 "못하는 글도 억지로 하노라 했다"라는 구절이 있고, 이 밖에도 홍국영이 계략을 써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야사가 전하는 것이 있다. 이는 홍국영이 후대에 세도정치가로 악명을 떨치게 되자 후대인들이 그의 간악함을 돋보이게 하고자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손을 음해하려는 외척당의 음모를 막고 세손이 보위에 오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 살 어린 정후겸,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과 극렬한 대립을 하여 후세에 이야깃거리를 낳기도 했다. 홍국영은 목숨마저 위태로운 세손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이에 정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고 아꼈다. 정조의 세손시절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심상운 등은 즉위 후 유배시킨 뒤 사약을 내려 죽였으며, 외조부인 홍봉한과 대립 관계였던 김귀주를 1776년 음력 7월 흑산도에 귀양 보냈다가 1779년 음력 6월에는 추가로 위리안치시켰다. 정조는 이에 대해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으며, 특히 이 책에서 홍국영을 '명의록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운 1등공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1776년 정조는 즉위 3일 후 그때까지 시강원 사서에 머물렀던 그를 전격적으로 동부승지에 발탁한다. 이어 7월에는 도승지로 삼고, 동시에 약원의 부제조로 임명했다. 이것은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1일 동안 임금과 공식적으로 2회 이상의 면대 기회를 가지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이 이후 이조 참판 등을 거쳐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홍국영은 군문의 장임 역시 역임했는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 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정조 1년인 1777년 7월 홍상간, 홍계능 등이 정조의 침실에 자객을 들여보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일에 연관된 사람들은 대부분 홍계희에 후손인 남양홍씨계열)이 자객사건연루자에 임금의 친위부대인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었던 것을 계기로, 호위청의 규모를 3청에서 1청으로 축소하고 인원도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감축한 뒤, 새로 숙위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고,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게 했다.

세도 정치와 말로

그는 이러한 권세에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데, 심지어 정조에게 올리는 문서를 일일이 자신이 먼저 검토 한 후 올리게 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778년에는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의 누이인 원빈 홍씨(元嬪 洪氏)가 가례를 올린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이 사건의 실체에는 의문점이 많다.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1786년 생을 마감했다.

1779년 음력 9월 26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돌연,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틀 후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일설에는 홍국영이 자신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이 정조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듬해인 1780년 정월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洪樂純)도 파직되고, 다음달인 음력 2월 26일에 후궁 간택을 반대하여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김종수가 상소를 올린 것도 원래 정조의 뜻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횡성, 다음에는 강릉으로 방출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흔히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 그가 유배 혹은 방축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종수가 탄핵 상소를 올린 날 정조가 내린 윤음은 "홍국영을 전리로 귀환歸還시켜 군신의 시작과 끝을 보존하라"라는 것이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때 조치에 대해 정조가 이후 즉위19년에 "이것은 방축이 아니니 홍국영의 이름이 금부의 사문서에 있는 것을 고치라"라는 발언을 한 점이다.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 기사에도 "임금이 끝까지 주벌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홍국영의 작질은 이후 순조1년에 가서야 정순대비의 명으로 정식으로 추탈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는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1977년 발간된 《전국문화재총람》에는 〈강릉 전 홍국영묘〉라는 제목으로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설명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묘소의 넓이는 약 50평 , 크기는 약 1미터 정도로 추정했으며, 1972년 후손들이 발견하였으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뒤에 강릉 종합운동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홍국영 묘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소 인근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이 전하는데, 명확하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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